그래, 포기하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지.


한참 촛불집회 생중계를 보다가, 잠시 담배 피러 베란다에 나갔는데, 그런 생각이 나더라. 지금 저 곳에선 살벌한 진압이 벌어지고 있는데, 눈 앞에 펼쳐진 한 밤중의 아파트 단지는 왜 그렇게도 평온스러운 걸까. 맞아, 그래. 눈을 돌리고 나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지. 싸움은 저기 저 멀리에서 벌어지고 있고, 나는 이렇게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는 걸.

오늘 집에 들어오는 길에는, 배가 고파 만두 한 판을 사들고 들어왔어. 더운 여름인데도 아주머닌 정말 열심히 팔고 계셨지. 정말 여름이 왔나봐. 가끔 바람이 불때면 가로수들이 속삭이더라. 사각사각, 따뜻한 날들이 왔다고. 아아, 그래. 향긋한 나뭇잎 냄새가 나더라. 귀에 꽂은 아이팟에선 넬이 간지럽게 노래 부르고, 낯선 추억들이 조금씩 몸을 감싸고.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어. 그 안에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더군. 경찰들이 물대포를 쏘고, 사람들을 잡아가고, 어디에선 손가락이 끊어졌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으려니 몸이 오싹해졌어. 그냥 꺼버리고 싶은데 차마 그게 잘 안되더라. 저건 그냥 전달받은 영상일 뿐인데. 그저 고개 한번 돌리면, 마우스 클릭 한 번 하면 지워버릴 수 있는데. 

맞아, 그래.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것만을 보면서 살아가.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무엇이 어떻게 일어났는 지조차 몰라. 바로 코 앞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내 눈 앞에만 보이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응, 그래. 우리는 그저 눈 앞에 일어난 것만을 바라보기에도 급급해. 어쩌면 그래서 인지도 몰라. 나는 더듬거리며 칼라TV와 오마이뉴스가 전해주는 영상을 읽어. 모르고 싶지 않기에, 모르척 할 수 없기에.

아까 저녁에는 경복궁 역에 갔었어. 길거리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경찰들이 그 사람들을 둘러싸고 갑작스럽게 연행해 가더라. 주변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싸우고, 나는 그 모습을 찍다가, 있다가 있을 간담회 때문에 잠시 빠져나와야만 했어. 웃고 떠들던 간담회가 끝나고 다시 광화문에 들렸다가, 오늘 있을 공연 준비를 해야해서 일찍 집에 들어왔어.

그래, 포기하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냐. 그저 눈 앞의 것만을 보며 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어. 하지만 볼 수 있는 것들 밖에도,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아. 어떤 하늘 아래에선 내가 아닌 네가 살고, 어떤 방 안에선 나와 같은 영상을 너도 볼꺼야. 내가 보는 세상과 네가 보는 세상은 그래서 아프게 연결돼. 그 순간 너와 나는, 다른 세상이 아닌 같은 세상을 살고 있어.

사람들이 연행되어 가는데, 나는 내 할 일 있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왔어. 뭔가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어. 그래,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어. 나도 내가 해야할 일이 있고, 그걸 지금은 포기할 수 없어. 방송국처럼 순식간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아프리카 BJ들 처럼 생활의 일부분을 내주면서 함께 할 정도의 용기도 없어.

미안해,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해서. 미안해, 니 옆의 자리를 지켜주지 못해서. 그렇지만 포기하진 않을께. 영상을 더듬으며 읽으면서라도 함께 할께. 내가 알고 있고, 보고 있고, 찍고 있던 그것만이라도 전달하려고 노력할께. 그 세계를 포기하는 순간, 너와 나의 세계는 멀어지고 말아. 나는 그것만큼은 잃고 싶지가 않아.

... 조금만 기다려줘. 곧, 그 자리로 달려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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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그니 | 2008/06/26 04:49 | 오후의 잔디밭 | 트랙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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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보고, 생각하고, 느끼.. at 2008/06/26 04:55

제목 : 애초에 촛불 집회는 있어서는 안 되었다.
촛불집회가 집시법 위반이니, 헌법이니 하는 말 놀음은 잠깐 넘겨도 된다. 말마따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촛불 자체가 켜져서는 안 되었다. 애초에 비상식적인 일이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들 중 일부가 정책에 반대하며 길거리에 나오는 것 부터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간다면 그런 일 자체가 있을 리 없고, 누구 말마따나 우둔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천민들이 국가가 하는 일에 반발해서 집단 행동을 나타내는 것 부터가 통치의 ......more

Commented by H모 at 2008/06/26 04:54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남이 아닌 '우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트랙백해갑니다. (꾸벅)
Commented by dcdc at 2008/06/26 04:57
곧 차 뚤리겠군요. 저도 갈 준비 해야겠습니다.
Commented by 권모씨 at 2008/06/26 05:01
결과가 어떻게 되던간에. 지금 할수 있는것들은 해둬야겠습니다. 저는 28일날 나갈겁니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몸 조심하시길..
Commented by 이스트라 at 2008/06/26 05:09
길게...끈질기게 갈 싸움이에요..때로는 쉬어가면서..때로는 치열하게 말이죠
Commented by 타누키 at 2008/06/26 05:10
시큰..
Commented by 바일라 at 2008/06/26 08:12
몇번 참여 했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 주려했던 저에겐 챙피한 글이네요.
Commented by 오타마 at 2008/06/26 09:57
왜이렇게 동감이 되는지...
Commented by ALICE at 2008/06/26 08:37
어제는 동생이랑 같이 나갔다가 밤 10시쯤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전해듣고 정말 무기력감에 빠지더군요..
Commented by 카루 at 2008/06/26 08:57
정말 속이 끓고 있는 요즘이에요...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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