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후의 내가, 10년전의 나에게


널, 죽이겠어.
널, 죽이고 말겠어.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소리가, 그렇게, 날 따라오며, 외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들이 내 어깨를 찌르며, 난 무서워 소리도 못지르고, 울먹이며, 도망치고 있었다. 팔이 떨어진 것일까, 피가 솟는 느낌, 배가 찢어진 것일까. 아파. 아파. 아파. 아냐,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새벽, 1시 30분. 집의 마루. 아, 그렇구나. 나, 지금, 집에 있구나. 어떻게 된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른발이 아팠다. 쿡쿡. 세번째 발가락이 퉁퉁 부은것 같다. 아, 그렇지. 쓰러졌었지. 집에 돌아와 물 한컵 마시다가, 그냥, 쓰러졌었지. 갑자기 넘어지듯 쓰러졌다가, 왠지 누운 것이 너무 편해, 일어나기 싫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던 것일까. 그냥, 누운 채로 잠이 들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상하게,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나, 살아있는데, 어디 한군데 베인 곳은 없는데,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다. 캄캄한 집에서, 무엇인가가, 갑자기 튀어나와, 너를 죽일꺼야. 그렇게 말하며 나를 찌를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간 것일까. 나를 빼고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직 지랄탄 가루가 남아있어서 인지, 눈이 자꾸 매웠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켰다. 문득, 손에 낯선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까만 점들이 손등에 콕콕 박혀 있었다. 뭐야, 이건. 손을 들어 자세히 보는데, 코를 찌르는 지랄탄 냄새. 맞아. 아까 지랄탄이 날라왔었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손등으로 쳐냈었다. 시커멓게 탔던 목장갑.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장갑의 사이사이로, 지랄탄은, 내 손등을 태우고 달아나 버렸다. 아아, 정말 지독하군.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그러다 다시, 이불위로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담배를 피고 싶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피곤해. 눕고 싶은데, 잠을 자고 싶은데, 다시 악몽을 꿈꿀까봐 그러지도 못하겠어. 전화를 하고 싶어. 아무라도 상관없이 전화를 하고 싶어. 전화를 해서 아무 얘기나 하고 싶어. 지금은 아무도 없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발이 아파. 눈이 매워.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벌써 몇일째 이렇게 사는 것일까. 일주일에 나흘은 저녁밥 대신에 지랄탄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살은 왜 안빠지는 것일까. 나, 치열하게 살고 싶은데,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데, 가끔 그렇게 생각을 해. 나, 혼자만 치열한 것은 아닐까. 혼자 지랄탄 맡아가며 악악 대다가, 나, 어디서, 혼자, 그렇게 쓰러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기기 위해 시작했던 싸움은 언제나 깨졌었다. 깨지다보면 언제나 난 혼자였고, 친구들은, 벌써, 저기, 멀리에 서있었다.

바보, 아직까지 거기에 있니?
바보, 아직까지 정신 못 차렸구나.
바보, 너 밥벌어 먹을 자신은 있니?
바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바보, 넌 관점에 문제가 있어.
바보, 변혁적 학운은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바보, 너 토익은 몇 점이니?
바보, 나를 따라와, 아니면 널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거야.
바보, 넌 우리와 갈 길이 달라.

하지만, 막상 이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떼거지로 모이기 시작하면, 나는 다시, 걱정하기 시작한다. 이러다 정말로 깨지는 것은 아닐까. 지리하게 싸움을 끌다가 망하지는 않을까. 정말 우리가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저들은 지금 단지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린 승리할 수 있을까. 정말 이길 수는 있을까. 세상의 여기저기서, 여전히, 목소리 큰 친구들은 떠들어대고, 이러면 이길 수 있다고, 투쟁은 이렇게 해야한다고 떠들어대고.

사람을 사랑하냐고, 누군가가, 그런 편지를 보냈었다. 사람을 믿냐고, 사람을 사랑하냐고. 아냐, 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말로, 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그저 사랑하는 척 하구, 사랑하는 듯 행동하지만, 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사람을 사랑하는 척 해야 사랑받으니까, 나, 사람을 사랑하는 척 했을뿐. 미안해. 정말은, 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믿지 않아. 지멋데로 목청만 큰 사람들, 나, 정말로 믿지 않아. 자기 얘기만 할 줄 아는 사람들, 나, 정말로 믿지 않아.

나흘동안, 네시간 정도를 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몸에 피 대신 다른 약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찌뿌둥. 그런데도, 무서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문서를 쓰고, 사람들이랑 싸우고, 전경이랑 싸우고, 명동 성당에 가서 사수를 서고, 얼굴 따가운 것이 싫어서 세수도 안하고 ... 그러다 문득, 쓰러져 악몽을 꾸고, 악몽이 무서워, 잠도 자지 못하고.

...너를 죽일거야.

제발 죽여주렴. 이 못난 놈을 차라리 죽여주렴. 이름 모를 공포. 제발 나를 죽여주렴. 차라리 나를 죽여주렴. 그러다, 그러다, 그러다, 바보 같았던 내 친구. 큰 두 눈을 껌벅이며, 그저 어눌하게 가끔 말을 해주고 했던 내 친구. 내 이야기만 하기 좋아하던 나를, 아무 이유없이 이해해주던 친구. 그러다 그만,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난 내 친구.

미안. 나, 정말 바보야. 또 투정을 부렸구나. 너에게, 나, 또 투정을 부렸구나. 또 내 얘기만 하구, 내 얘기를 사람들이 안들어준다고, 너에게, 그렇게 투정을 했구나. 사람들 얘기를 들어줄 생각도 없이, 나, 또, 내 얘기만 했나 보구나.

헤헤, 아까 돌 던지다 다쳤어요. 시커멓고 피가 엉겨붙인 손을, 자랑스레 내밀던 후배 녀석 하나. 난 녀석에게, 잘했다고, 그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다. 왜 목장갑을 안꼈냐구, 담부턴 장갑을 끼고 싸우라고, 기껏 다친 녀석에게, 그런 얘기밖엔 해주지 못했었다. 그래, 난, 기껏해야 그런 이야기밖엔, 해주지, 못했었다.

무서워도 잠을 자야해. 그리고 꿈을 꿔야 해. 그래, 무서워도 다시 잠을 자야해. 무서워말고, 이러다 미치는 것이 아닐까라고 걱정하지 말고, 다시 잠을 자야해. 꿈을 꿔야 해. 그래야 다시 잠에서 깨어나지. 안그러면 언젠간 쓰러질지도 몰라. 다시 잠을 자고, 힘을 내야지. 정말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기왕 사랑하는 척할거면, 정말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정말로 열심히 사랑하는 시늉이라도 내야지.

하지만, 그래도, 왜 자꾸 무서운 것일까. 혼자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그냥, 눈물이 날려고 했다. 나, 눈이 매워, 피곤해, 발이 아파, 전화를 하고 싶어. 아무나 붙잡고, 아무 얘기나 하고 싶어. 잠이 들기 전에, 잠에서 깨면 볼 누군가가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 그렇게 믿으며 잠들고 싶어. 전화를 하고 싶어. 아무나 붙잡고, 그렇게, 전화를 하고 싶어. 이렇게 울지만 말구. 혼자, 투정만 하지 말구.





'jeff님의 글'을 읽다가, 문득 나우누리에 남겨놓은 옛날 글들이 생각나 찾아읽었다. 그래, 한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지워지고 잊혀져버린, 그런 시대가. 그리고 나는 그 시대를, 나약하고 나약하고 나약하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기어가며, 발버둥치면서 살아왔다.

저 글이 씌여진 시기는 1997년초다. 1996년 12월 크리스마스,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에서 노동법을 날치기로 개정하는 바람에, 민주노총에서 총파업을 벌이던 시기다. 여전히 최루탄과 쇠파이프가 서로 난무하던 때였다. 나우누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지하철 노동조합에 근무하던 형이 급하다고, 빨리 와달라고 해서 명동성당 농성단에 갔다가, 한달 가까이 결합해 있었던 것 같다.

가끔 집에 들어와서는 기절하듯 쓰러졌는데, 그렇게 쓰러지고 나면 꼭 악몽을 꿨다. 악몽이야 항상, 몇년째 계속되던 귀신꿈. 겁이 많아서인지, 악몽을 꾸다가 때면, 또 한참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 그리고 윗 글은, 그때 깨어나서 피씨통신 게시판에 적었던 글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독감이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었지만.

김영삼 정부의 수없는 뻘짓들이 이어졌던 그 때, 그 전해에는 많은 아이들이 죽었었다. 스스로 분신한 해인이, 경찰에 쫓기다 사망한 수석이, 학교 당국의 횡포에 항의하다 분신한 영권이... 이제 그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있을까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 전전해와 전전전해에는 다리 끊기고 건물 무너지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 어쨌든, 그해 겨울, 한국은 결국 IMF를 맞이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가끔 그 시대를 꺼내 혼자서 복기해 보고는 한다. 무엇이 어떻게 연결되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는 지에 대해. 그리고 반성한다. 하면 좋았으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보면 좋았으나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뭐, 여전히 나는, 나약하고 나약하다. 그래, 나는 그저 나약할 뿐이다.

지난 일요일 아침, 광화문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웃고 춤추던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이 쏟아졌던 이유가 그래서였을까. 기쁘고 즐거웠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어줘서. 행복하고 고마웠다. 이렇게 끝까지 춤추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어서. ... 정말 나는 10년전에, 전화할 친구가 필요했었다. 끝이 다가와도 남게될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라고, 등을 빌려줄 누군가가 필요했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정말 원했던 것은, 함께 있어줄 누군가였다.

피식, 웃음이 난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찾고 있는 것은 결국, 똑같구나. 응, 정말 무정할 정도로 똑같구나-하고. 그리고 10년전의 나에게 가만가만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잘 버텨왔다고,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고- 도닥도닥, 위로를 한다. 괜찮다고, 응, 조금 더 나약해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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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그니 | 2008/08/22 16:57 | 오후의 잔디밭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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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카루 at 2008/08/22 17:08
그래도 저보다는 나약하지 않으시답니다.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Jeff at 2008/08/22 17:49
자그니 님 지금 모습은 10년 전의 자신에게 부끄럽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실 모습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제 글이 트랙백되어서 부끄럽지만 가문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
Commented at 2008/08/22 20:4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바일라 at 2008/08/22 20:50
사람들이 웃고 춤추고 즐거워 하는게 가장 멋지고 고마운 일 맞네요. 나약하면 어때요? 잘 살아가고 있잖아요.
Commented by draco21 at 2008/08/22 21:40
자그니님께선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실진 몰라도... 치열하게 그 시절 보내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속의 그시절을 비교해본다면..... ^^:
Commented at 2008/08/22 21: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자그니 at 2008/08/23 19:39
카루/ 카루님이 왜 나약하십니까! (엉엉)

Jeff/ 고맙습니다. :)

비공개/ ....최후의 최후까지가면 고려해보겠습니다...(응?)

바일라/ 대신 고민이 많아진다는 단점이.. :)

draco21/ 아는 사람이 많은 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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