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2 02:26

벌새, 내 삶이 별로 빛나지 않더라도 읽고 보고 느끼다



영화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외치는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섬찟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문을 두드린, 강남에 있는 복도식 아파트 집 호수가, 902호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남에 있는, 복도식 아파트, 902호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 그때 우리집 문 미친 듯 두들긴 거 너였냐? (농담)





웃자고 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았던, 또는 살지 않았던 사람의 감정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러냅니다. 가끔 풍경으로, 가끔 농담으로, 가끔 사건으로, 가끔 .... 폭력으로. 지난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땐 참 이런저런 폭력이 난무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주인공은 강남 어드메에 살고 있는 중학생입니다. 공부 잘하는 오빠와 날라리 언니가 있습니다. 흔히 있는 언저리 날라리 학생(...)입니다. 공부도 못하고 쎄지도 않고. 예쁘긴 한데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게 언급이 안되니 넘어가고. 적당히 놀고 사고도 칩니다. 하지만 ... 학급 사회에서는 엇나가, 언저리에 있죠. 싫든 좋든 아싸.



언저리에겐 언저리 친구가 있습니다. 언저리 남자 친구도 있습니다. 배경은 1994년 여름. 초여름에 시작해 가을 수학 여행까지. 영화는 주인공의 일기를 보듯, 순간 순간을 침묵으로 자르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연애, 노래방, 트램폴린, 도둑질, 오빠의 폭력, 말이 거친 아빠, 지쳐있는 엄마, 떡 가게, 등교길, 병원, 친구, 후배, 일일 나이트. 뭐 이런 것들을.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어요. 각오하긴 했지만. 시사인에 실린 영화평을 읽는데, 아이쿠, 이건 영화관에서 봐야겠다, 그리 생각했거든요. 다시말해, 어디에 내 몸을 가둬 놓고 봐야할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영화를 보다 시계를 들여다본 적이 네 번. 아아 그래도, 보길 잘했네요.



영화를 본 친구가 말합니다. 어딘가 자기 자신을 보는, 어린 시절 자기를 보는 기분이었다고. 당연하죠. 이 영화는 의외로 철저히, 주관적 시점에서 찍혔거든요. 주인공은 많이 상처 받고 또 상처 받는 존재입니다. 학교에서, 친구에게, 아빠에게, 오빠에게, 남자 친구에게. 아니, 상처라기 보단,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할까요. 많은 언저리 인생처럼.

밖에서 바라보면, 정말 한심한 학생이었을지도 몰라요. 공부 못하죠, 싸움 못하죠, 성격만 무르지 도둑질도 해, 가지 말란 곳에 가서 놀아, 담배도 펴(...). 내 안의 작고 불쌍한 나라고 생각하면 도닥여 주고 싶지만, 많은 언저리 날라리 중학생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음. 현실은 실전이라고 말해주고 싶....



뭐, 원래 사람이 그렇잖아요. 나는 못보고 다른 사람만 보이는 거. 나도 상처를 줬을텐데, 내가 상처받은 일만 자꾸 생각나는 것처럼. 비루한 내 모습을 그렇게라도 보듬지 않는다면, 많은 추억은 지옥이 됩니다. 신나서 고생한 기억을 늘어놓는 사람은 많아도, 그 고생 또 하라면 못하겠다 하는 것처럼.

운도 좋았네요. 한문 선생님 같은, 좋은 어른을 만난 거. 신경숙님과 그 선생님 이야기처럼, 마음이 어딘 가를 헤맬 때, 기댈 어른이 하나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버팁니다. 그게 돌아올 자리가 아니라도, 그게 원래 사랑받고 싶었던 그 사람이 아니어도. 그 마음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 지 서툴러도.

... 하지만 만났던 사람과는 언젠가 헤어집니다.



내 삶은 언젠가는 빛날까요? 모르겠어요. 훌쩍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마음은 90년대 어딘가를 헤매입니다. 아니 90년대가 아니라, 허망하게 흘러다녔던, 어떤 시절이겠죠. 언젠가는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언저리에 있습니다. 그저 달라진 건, 그래도 괜찮아-라는, 씁쓸한 인정. 어떤 포기.

질문은 영원히 질문으로 머물고, 언젠가 들려주겠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게 됩니다. 대답 없는 질문과 약속이 이어져도, 우리는 그러려니하고- 이젠 살아갑니다. 다시 새로운 일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싸우고, 헤어지면서. 그러다 언젠가는 깨닫겠죠. 헤어지지 않고 사랑한 적은 없다는 걸. 그러니까, 헤어지지 않으면, 다시 사랑할 수도 없다는 걸.


... 그나저나, 옛날 아파트 구조는 왜 그리 비슷한 건가요. 보다가 우리 집인줄 알았네(...).

덧글

  • Barde 2019/10/02 05:01 #

    저 아파트가 대치동 은마아파트니까 주인공 가족은 시세차익을 얻지 않았을까요. ^^...
  • 자그니 2019/10/03 03:47 #

    전세가 아니라 자가였다면... 부, 부자네요....;;
  • 타마 2019/10/02 09:08 #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흠...
    애초에 빛이란게 뭘지...
  • 자그니 2019/10/03 03:48 #

    제 삶은 언젠가 '빚'이 되버렸어요...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